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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히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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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야시 히데사다는 16세기 인물로, 오다 노부히데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활약했다. 그는 노부나가의 후견인 역할을 했으며, 행정 및 외교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유키를 지지하며 반란을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이후에도 노부나가에게 불만을 품었다. 1580년 과거 노부유키를 지지한 이유로 모든 직위에서 추방되었으며, 교토에서 거주하다가 사망했다. 하야시 히데사다는 오다 가문의 권력 투쟁과 노부나가의 냉혹한 성격을 보여주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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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히데사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하야시 히데사다
본명미치카쓰
출생1513년
사망1580년 11월 21일
출생지오와리국
사망지교토
별명신고로
관직
관위사도노카미, 다지마노카미
직책가로
영주가스가이 영주
가문
씨족오치 성 이요고노 씨 지류 오와리하야시 씨
가문하야시 씨 (오와리)
가계
아버지하야시 쓰야스
형제쓰구모
배우자미상
자녀미치토키, 미치유키, 가쓰요시, 딸 (하야시 미치마사 부인), 센가 노부치카
군사 경력
소속오다 씨
주군오다 노부히데노부나가노부카쓰 → 노부나가
지휘가스가이
주요 전투아즈키자카 전투 (1542)
가노구치 전투 (1547)
아즈키자카 전투 (1548)
이노 전투 (1556)

2. 생애

하야시 히데사다는 16세기 초 오다 노부히데를 섬기며 정치와 외교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중신이 되었다. 노부히데 사후 오다 노부나가가 나고야 성에 배속된 후에는 히라테 마사히데와 함께 노부나가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고, 1546년 노부나가의 겐푸쿠 의식에 참여했다.[1]

그러나 노부나가의 불안정한 행동에 우려를 느껴, 1551년 노부히데 사망 직후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유키를 가문의 후계자로 비밀리에 지지했다. 1555년 노부나가가 기요스 성을 점령하자, 히데사다는 나고야 성을 방어하게 되었다.[2]

1556년 시바타 가쓰이에와 함께 노부나가를 몰아내려 했으나 이노 전투에서 패배했다.[1] 노부나가는 이웃 다이묘의 침략을 우려하여 임시 휴전을 중재했고, 히데사다는 사면받고 오다 가문을 위해 계속 일했다.

이후 행정 관료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기요스 동맹 체결에 입회하는 등 외교, 행정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5] 1568년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경했을 때 기청문에 가장 먼저 서명했다.[5]

1575년 11월 은퇴 후 오다 노부타다가로가 되었으나, 1580년 8월 과거 노부유키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노부나가에게 모든 직위에서 갑자기 추방되었다.[2][3] 추방 이유는 불분명하며, 노부나가가 히데사다가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히데사다는 교토에서 살다가 몇 달 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2. 1. 오다 노부히데 시대

하야시 가문은 오와리 국 카스가이 군 오키무라(현재의 아이치현 기타나고야시 오키무라)를 본관으로 하는 토호였지만, 히데사다는 아버지 하야시 미치야스와 함께 오다 노부히데를 섬기며 정치와 외교에 수완을 발휘했고, 군단을 통솔하는 역할로서 노부히데의 신임을 얻어 중신이 되었다.

하야시 미치카쓰 저택 터 (아이치현 기타나고야시 오키무라의 쇼린지)

2. 2. 오다 노부나가 후견역

오다 노부나가에게 나고야 성이 주어지자, 히라테 마사히데와 함께 노부나가의 측근 가신이 되었다(『노부나가 공기』).[2] 덴분 15년(1546년) 고와타리 성에서 거행된 노부나가의 원복에서 보좌역을 맡는 등, 노부나가의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2] 그러나 노부나가의 기행에 골머리를 앓았고, 덴분 21년(1552년) 오다 노부히데가 사망하고, 덴분 22년(1553년) 히라테 마사히데가 사망하자,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카쓰(노부유키) 옹립을 획책하게 된다.[2]

고지 원년(1555년) 기요스 성 주군 오다 노부토모가 오다 노부미쓰에게 살해당하고, 노부나가가 기요스 성을 점거하자, 히데사다는 나고야 성의 수비역을 맡게 되었다.[2]

2. 3. 이노 전투

1556년, 하야시 히데사다는 시바타 가쓰이에 등과 함께 노부카쓰를 옹립하여 거병했으나, 이노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배했다.[1] 히데사다는 직접 전투에 참전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봤기 때문에, 그 동향은 불분명하다.[1] 전투 후 노부나가에게 용서받아 가문의 숙로 지위에 머물렀다.[1]

노부나가 공기에 따르면, 이노 전투 전 하야시 형제의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한 노부나가가 방문했을 때, 동생 미치토모가 노부나가를 습격하려 했으나 히데사다가 "3대에 걸쳐 은혜를 입은 주군에게 손을 댈 수 없다"며 반대하여 노부나가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2. 4. 오다 노부나가의 필두 가로

오다 노부히데 휘하에서,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가 나고야 성에 배속된 후에는 젊은 노부나가를 섬겼다. 히라테 마사히데와 함께 노부나가의 후견인 역할을 했으며, 1546년 노부나가의 겐푸쿠 의식에 참여했다.[1]

행정 관료로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노부나가에게 중용되었으며, 기요스 동맹 체결에 입회하는 등 외교, 행정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노부나가가 발급하는 정치 문서에 항상 서명했고,[1] 1568년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경했을 때 기청문에 가장 먼저 서명했다.[5] 야마시나 도키쓰구가 노부나가를 알현할 때 항상 히데사다가 주선자 역할을 했다.[5]

무장으로서의 활약은 적었지만, 하리마 간요시 성 공방전 등에 참전한 기록이 있다.[5] 군감, 군메쓰(軍目付), 후속 부대 등을 이끄는 무장으로 종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5]

2. 5. 오다 노부타다의 필두 가로

오다 노부타다가독을 물려받은 1576년, 히데사다는 노부타다의 가로가 되었다. 시바타 가쓰이에, 사쿠마 노부모리, 아케치 미쓰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등에게 영지 규모는 뒤처졌지만, 필두 가로(숙로)의 지위는 유지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개최하는 다회에 다른 중신들과 함께 초대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579년, 아즈치 성 덴슈가 완성되었을 때 노부나가는 히데사다와 무라이 사다카쓰 두 사람에게만 구경을 허락했다.[5]

2. 6. 갑작스러운 추방

1580년(덴쇼 8년) 8월,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안도 모리나리, 니와 우지카쓰와 함께 하야시 히데사다는 오다 가문에서 갑작스럽게 추방되었다.[2][3] 노부나가는 히데사다가 과거 오다 노부유키를 지지하여 모반을 일으킨 것을 추방 이유로 들었지만, 이는 24년 전의 일이라는 점에서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다. 따라서 그 진상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많다. 『노부나가 공기』에서는 "자세한 내용은 수년 전 노부나가 공이 곤경에 처했을 때 야심을 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며[3], 노부나가가 과거 노부나가 포위망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모반을 꾀하고 적과 통했다는 것이나[4], 이 기술은 그다지 신뢰할 수 없다.

일설에는 히데사다가 노령으로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에 실력주의를 채택했던 노부나가가 히데사다의 행위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그렇다면 히데사다를 강제로 은거하게 하면 될 일이며, 오다 가문 내에 동요를 초래하는 추방 처분을 한 이유는 불분명하다.[5]

2. 7. 추방 후

오다 노부나가에게 추방된 하야시 히데사다는 교토에 거주하며 '''난부 가쓰토시'''(난부 타지마노카미)로 개명하거나 아키 국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6] 그러나 추방될 당시 히데사다는 이미 고령이었고, 추방 처분을 받은 것이 몸에 밴 탓인지 추방 2개월 후인 1580년 10월 15일에 사망했다고 전해지지만, 그 행적은 확실하지 않다.[6] 동생인 미치토모를 그린 '하야시 미사쿠노카미 상'의 찬에 의하면 향년 68세로 알려져 있다.[7] 현재도 히로시마시내에 묘비가 있다.[6] 아들인 이치요시는 아버지와 함께 추방되어 은거한 후, 옛 지인인 야마우치 가즈토요를 섬겼으며, 자손은 도사 번에서 중신이 되었다.

3. 평가

하야시 히데사다는 오다 가문 2대에 걸쳐 중신으로 활약한 인물로, 특히 행정, 외교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와의 관계는 복잡했는데, 후견인 역할을 하면서도 노부나가의 기행에 불만을 품고 동생 오다 노부유키를 옹립하려다 실패했고, 결국 추방당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1] 히데사다의 추방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오다 가문의 권력 투쟁과 노부나가의 냉혹한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1]

히데사다는 오다 노부히데를 섬기다가, 노부나가가 나고야 성에 배속된 후에는 가로이자 후견인으로서 노부나가를 보좌했다.[1] 1551년 노부히데가 사망하자, 히데사다는 노부나가의 불안정한 행동에 우려하여 동생 노부유키를 지지했다.[1] 1556년에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함께 노부나가를 몰아내려 했으나 이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면받았다.[1]

1575년 은퇴 후 오다 노부타다의 멘토 역할을 맡았으나, 1580년 노부나가는 과거 노부유키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히데사다를 추방했다.[1] 이는 노부나가가 히데사다를 더 이상 쓸모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1]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織田信長の家臣団―派閥と人間関係 中央公論新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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